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케 칸 (문단 편집) == 여담 == 자신과 남에게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라 그의 치세에 몽골에는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은 큰 아버지인 차가타이를 쏙 빼닮았다.] 몽케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는 몽골 역사 상 가장 강인했던 여걸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케레이트 부족 출신에, 칭기즈 칸의 후원자이면서 훗날 대립하다 죽은 옹 칸의 조카 딸로 전리품처럼 툴루이에게 넘겨졌다가 남편이 죽은 후에는 칸으로부터의 혼인 명령이 내려왔으나 거절, 수없이 정치 공작을 펼치고 힘을 기른 끝에 아들 넷을 전부 칸의 자리에 올렸으니…[* [[아리크 부카]]도 어쨌든 칸은 칸이다. 오히려 정통성 면에서는 이쪽이 쿠빌라이보다 훨씬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입장에서는 최악의 적국 군주라고 할 만한데 [[여몽전쟁]] 때 고려를 가장 심하게 공격했던 칸이 이 인물이기 때문. 물론 [[여몽전쟁]] 자체가 상당히 장기전으로 흘러갔고 이전 [[오고타이 칸]] 시절 벌어진 공격 역시 격렬한 편이었지만, 몽케 칸 때의 파상공세로 인해 고려는 국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몽케 본인이 칸 위에 오른 지 2년 째인 1253년부터 공격을 재개하였고, 세상을 떠난 1259년까지 무려 5번씩이나 쳐들어왔다. 특히 1254년 한 해 동안 이루어진 침략이 고려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혔는데 포로만 해도 무려 20만 6천 8백여 명에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고려사에 나올 만큼 엄청났다.] 그 와중에 고려의 외교적 술수에 당한 적도 있다. 3차 침공 당시 고려에선 종친인 [[영녕공]] 왕준을 [[고종(고려)]]의 동생으로 속여서 인질로 보냈다. 이후에 민칭(閔偁)이란 자가 사실을 고발해서 영녕공이 고려의 왕자가 아니라 친척임을 알렸다. 이에 대해 영녕공은 어렸을 때부터 궁궐에서 자라 자기가 국왕의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고 우겼으며 그와 함께 온 참지정사 최린도 '왕의 친자(親子)는 아니지만 왕의 사랑하는 자식(愛子)이니 그게 왕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우겼다. 당연히 몽케 칸은 당연히 믿지 않고 전에 고려에서 몽골에게 보낸 표문을 읽어 보았는데 정말로 표문에도 '친자식(親子)'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愛子)'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 몽케 칸은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 일에 대하여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http://db.history.go.kr/id/kr_099r_0010_0020_0110|고려사 열전 12권 [[최유청]] 중 부 최린 부분]]] 그래도 영녕공 왕준이 맘에 들었는지 자신의 딸을 시집보낸다. 그리고 [[홍복원]]이 왕준을 개로 칭하자 공주가 그 무례한 말을 몽케에게 전했고, 장사 수십 명을 보내 홍복원을 몽둥이로 때려죽인다. 죽기 전 조어성을 함락할 때 성내 군민들을 몰살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